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기타 == [[파일:Vincent_van_Gogh_January_1873_(restored).jpg]] 20대 초반인 1873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파일:vangogh.jpg ]] 1886년,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찍힌 사진. 등지고 앉아있는 사람이 고흐이다. 고흐는 생전에 사진은 감정이 결여돼있다고 말하며 사진 촬영을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동생인 테오가 어머니의 사진을 보내주자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며 자신이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내며 조화로운 색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흑백 촬영밖에 안 되던 당시의 사진을 디스했다. 이러한 성격때문에 생전에 자신을 촬영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때문에 공인된 고흐의 사진은 위의 2장이 전부이다. 그 중에 하나는 뒷모습만 찍혀 우리가 흔히 아는 초상화 속 고흐의 모습은 실제 사진으로는 볼 수 없다. [[파일:external/thereadingwire.files.wordpress.com/vincent-van-vogh-adult.jpg]] 실제 반 고흐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90년대에 한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법의학자들이 반 고흐의 사진이라 확인했지만, 출처가 불명확해 실제 그의 사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일생은 불운과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죽은 이후 가장 영예를 누린 화가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2020년 6월 현재 환율로 약 1003억 2천만 원)에 일본의 제지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齊藤了英, 당시 74세)에게 팔리며,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그 그림의 다른 버전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죽고 나면 그림을 관에 같이 넣고 [[화장(장례)|화장]]해달라"는 말을 했다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고 부랴부랴 농담이라고 변명했다. [[블랙기업|악랄한 기업가로서 회사원들 복지는 최악이었던 터라]] 노조에서는 "회사원을 등쳐먹은 돈으로 그림 사서 장작으로 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고... 이후 사이토는 1996년 세상을 떠났고 그림의 행방은 한동안 묘연해졌다.[* 참고로 사이토의 기업은 그가 죽자 재정난에 빠져 다른 미술품들을 연이어 팔아야 했을 정도로 몰락했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불에 태워 함께 묻지 않았다는 것.[* 이건 그가 죽자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엄청난 항의와 질문 끝에 [[유족]]들이 맹세한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고흐를 아끼고 연구를 많이 하며 소장도 많이 하고 있기에 그의 발언은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욕먹었다. 심지어 사이토와 친한 다른 일본 재벌들에까지 개인적 자리에서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안되죠. 인류문화유산을 겨우 장작으로 쓰신다고 하는 건 파렴치한 [[이기주의]] 아닙니까."라는 쓴소리까지 듣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7년에 1997-1998년 즈음에 '''[[오스트리아]]인 펀드매니저인 볼프강 플뢰틀(Wolfgang Flöttl)에게 팔렸다'''는 것이 확인되며 논란이 종결되었다. 상당수 명화를 소유한 이들은 관심받는 걸 질색하거니와 그림을 걸어두고 홀로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기에 누가 사갔는지 일체 비밀에 부쳐지는 경우가 많아 진상이 늦게 밝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https://en.wikipedia.org/wiki/Ryoei_Saito|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아예 다른 설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화장 발언 자체가 와전된 말이었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높은 상속세에 사이토가 불만을 표하며 "죽고 나서 가족들에게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물게 할 바에는 그림을 나와 함께 화장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겠다"고 반 농담조로 한 말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림을 구매했을 당시에도 관세와 특수소비세 등의 명목으로 미화 2400만 달러에 달하는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고. 고흐가 살아 생전 판 그림은 '''단 한 점''',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뿐이다.[* 400 프랑에 팔렸는데,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이었다. 물론 현재 고흐의 그림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단 고흐의 그림이 한 점만 팔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고흐가 알게 모르게 싼 값에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밥 한끼 값으로 대신 지불한 그림도 많았기 때문에, 고흐의 전기작가들 가운데에는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허무맹랑한 전설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한 예로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10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뭐 돈 안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위에서 기술했듯, 전적인 생활비를 그의 동생 테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이 위대한 화가는 때때로 돈이 없어 '''물감을 먹기도 하였다.'''[* 고흐는 예전부터 종종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의 맛을 보곤 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먹은 게 아니라 마약 성분이 있는 [[압생트]]를 금지 당하자 금단 현상 때문에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 자체가 당대 프랑스의 와인 제조업자들이 당시 파리에서 [[희석식 소주]] 정도의 포지션이었던 압생트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자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마약성분이라고 주장하는 쓴쑥([[웜우드]])에 들어있는 투존 성분은 흔히 알려져 있듯 환각과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물론 분명히 과도하게 음용했을 때 어지럼증, 발작, 혼수상태,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압생트만으로 이 정도로 다량의 투존을 섭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투존 성분이 들어간 쓴쑥 자체도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베르무트]]나 빅스 베이포럽(코막힘 치료제) 등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또한 저 투존 성분의 부작용이라는 게 사실 보면 습관성 과음의 증상과 다를 것도 없다. 즉 압생트야말로 음모론의 희생자라는 이야기. 실제 압생트의 맛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향신료인 [[아니스(초본)|아니스]]이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ortrait of Pere Tanguy.jpg|width=100%]]}}} || || {{{#white '''탕기 영감의 초상, 1887년'''}}} || [[우키요에]]의 [[자포네스크|영향을 많이 받은]] 서양의 화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림의 배경에 [[후지산]]과 [[벚꽃]]나무와 게이샤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우키요에로 빽빽이 들어차 있다. 우키요에를 본딴 습작을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일본]]에서 고흐의 그림은 인기가 많고 연구도 많이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서 괜히 주인공이 고흐의 그림으로 들어가서 고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선 [[마틴 스코세이지]]가 고흐를 연기하여 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앞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그의 귀를 자른 건 고갱이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아직 가설 단계이므로 그냥 '썰'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갱이 그랬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는 반박이 있다. 고갱이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었던 인물인 건 분명하지만, 고흐가 귀 자른 사건은 고갱에게도 상당히 충격으로 남았다는 지적이 있다. 고갱이 파리로 도망치듯 돌아온 뒤에 만든 도자기 작품 중에 귀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형상의 도자기가 있는데 이는 고흐의 사건을 반영했다고 본다면 과연 고갱이 그랬을지는 의문. 고흐의 그림만을 대상으로 첫 전시회가 열린 것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1930년대부터 고흐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가 피카소처럼 91세까지 살았다면 1944년에 세상을 떠났을 텐데, 그랬다면 뒤늦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후세인들에 의해 생시에 명성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고흐가 캔버스를 사곤 했던 가게의 조카인 [[잔 루이스 칼망]](Jeanne Louise Calment, 1875년 2월 21일 - 1997년 8월 4일)은 '''(122년 164일)세까지 장수하면서''' 세계 공인 최장수 기록을 남겼다. 1994년 119세 생일 때 자기가 14살이던 1889년에 35살이었던 반 고흐를 만난 것을 회상했는데 인상은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이며 지저분한 옷차림에 불쾌한 인상[* Dirty, badly dressed and disagreeable.]에 정말 못생기고 술냄새를 풍기는 불평꾼[* very ugly, ungracious, impolite, sick.]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잔 칼망은 고흐에게 색연필을 판매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고흐가 칼망에게 집적댔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페도필리아|소아성애자]]라는 루머도 있다. 이게 노망인지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31100329219008&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3-11&officeId=00032&pageNo=19&printNo=13989&publishType=00020|1991년 경향신문 기사]] 애초에 고흐의 주변 사람들은 주변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생기면 일단 고흐를 범인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고흐를 미치광이 취급했기에 오해였거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또한 저 당시에는 [[조혼]]이 가능했기 때문에 진실이 무엇이든 오늘날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파일:attachment/빈센트 반 고흐/목포반씨.jpg|width=500]] 한동안 [[네이버]] 인물 정보란에 출생 지역이 [[전라남도]] [[목포시|목포]]라고 잘못 적혀 있었다.[* 현재는 수정되었다.] 2016년에 14년 전 도난당했던 1882년작 '''스헤베닝언 해변'''과 1884년작 '''누에넨 교회'''가 [[이탈리아]] [[마피아]] 은신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721068|#]] 2021년에 고흐가 스케치한 그림 1점이 발견되었다.[[https://m.yna.co.kr/view/AKR20210917127800009?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